2월, 2025의 게시물 표시

힘이 되는 니체의 말들: 삶의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지혜

이미지
  삶은 우리를 때로는 따뜻하게 감싸고, 때로는 차갑게 몰아친다. 직장에서의 괴롭힘, 관계에서의 상처, 퇴직 후의 고립과 같은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고난이다. 특히 60대 이상의 퇴직자들에게는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며 세상과의 단절이 깊어지는 순간들이 낯설고 무겁게 다가온다. 그러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강렬한 말들로 우리에게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는 힘을 전해준다. 니체의 말들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고통을 직면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철학은 삶의 모든 순간을 끌어안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라는 초대다. 이 글에서 나는 니체의 힘이 되는 말들을 통해, 퇴직 후 고립과 상처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길을 나누고자 한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인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고난의 가치를 역설한다. 퇴직 전, 나는 직장에서 소시오패스적 동료의 냉혹한 말과 행동에 시달렸다. 그때는 매일이 전쟁 같았고, 집에 돌아오면 지친 몸을 이끌고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았다. 퇴직 후 그 기억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지만, 어느 순간 이 말이 떠올랐다. 그 괴롭힘은 나를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 속에서 인내를 배웠고, 나를 지키는 법을 익혔다. 퇴직 후 고립 속에서 이 말을 곱씹으며, 나는 과거의 아픔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니체는 고통을 피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깊이와 강인함을 더하는 연료다. “너 자신이 되라” “너 자신이 되라”는 니체의 또 다른 강렬한 외침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직장에 있을 때는 상사의 기대, 동료의 시선에 맞춰 나를 잃어버린 적이 많았다. 퇴직 후에는 그 모든 외부의 잣대가 사라졌고, 처음엔 허전함이 컸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말은 나를 다시 세우는 힘이 되었다. 사회적 역...

노자와 함께하는 중년의 휴식

이미지
  가끔은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며 내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헤아리다 보면 문득 불안이 밀려온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의미가 있는지, 혹은 남은 삶에서 또 어떤 시련이 나를 기다릴지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힌다. 젊은 날의 패기와 꿈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같은 자리로 향하는 발걸음,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늘 같은 소파에 앉는 반복 속에서 문득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는 걸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주변을 둘러보면 누군가는 여전히 성공의 정점에 올라 있고, 또 누군가는 안정된 삶을 누리며 여유롭게 웃고 있다. SNS에서는 화려한 여행 사진과 자랑스러운 성취들이 넘쳐난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나를 그들과 비교하며 작아진다. 내가 놓친 기회들, 가지 못한 길들이 자꾸만 떠오르며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하지만 문득 깨닫는다. 지금의 내가, 그리고 나의 상황이 사실 괜찮다는 걸. 화려한 성취나 남들의 인정 없이도, 이 순간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걸. 세월을 겪으며 쌓인 주름과 피로 속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고, 그 자체가 작은 기적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이 말은 중년의 불안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는 조용한 가르침이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에게, 지금 이곳에 머물라는 따뜻한 손짓이다. ​ 미래에 일어날 일은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 아직 오지 않은 날을 붙잡고 불안해하며 오늘을 망칠 필요는 없다. 자식들의 앞날, 노후의 경제적 부담, 건강에 대한 걱정—이 모든 것이 나를 짓누를 때가 있다. 언젠가 자식이 독립하면 홀로 남을 텅 빈 집을 상상하고, 점점 느려지는 몸을 느끼며 병원 문턱을 넘을 날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차피 그때가 되...

[성경가르침]살아가라, 그뿐이다

이미지
 삶은 때로 거대한 물음표처럼 다가온다. 왜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머릿속을 채운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답을 찾으려 애쓸수록 더 깊은迷宮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는다. 어쩌면 삶에 그 모든 질문의 답을 억지로 찾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냥 살아가라, 그뿐이다. 성경에서도 이 단순한 진리를 이렇게 말한다. “오늘을 위한 너희의 양식을 구하라”(마태복음 6:11). 내일의 걱정까지 짊어질 필요 없이, 오늘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 된다는 뜻 아닐까. 살아간다는 건 거창한 목표나 완벽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숨을 쉬고, 발을 내디디는 것.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것. 그 단순한 행위들 속에 이미 삶이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들판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보아라. 수고하지도 않고 길쌈하지도 않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마태복음 6:28-29). 자연의 꽃도 그저 존재하며 아름답듯, 우리도 억지로 무엇인가를 증명하려 애쓸 필요 없이 살아가면 된다는 위로다. 고난이 닥치면 주저앉고 싶고, 기쁨이 오면 영원히 붙잡고 싶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 지나간다. 물 흐르듯, 바람 지나가듯, 시간은 우리를 데리고 앞으로 간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고난이든 기쁨이든, 그 순간을 이겨낼 힘은 이미 우리 안에 주어져 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걸음을 옮기는 것, 그게 살아가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지 못해도 괜찮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누군가는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누군가는 그저 하루를 버틴다. 어떤 방식이든, 결국 살아가는 건 똑같다. 웃음이든 눈물이든, 후회든 희망이든, 그 모든 게 쌓여 나라는 사람...

무심히 살면된다 대부분의 일은 알아서 해결된다

 가끔은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남들처럼 잘되지 않는지, 혹은 미래에 어떤 벽이 나를 기다릴지 생각하다 보면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문득 깨닫는다. 지금의 내가, 그리고 나의 상황이 사실 괜찮다는 걸. 완벽하지 않아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화려하지 않아도, 이 순간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걸. 미래에 일어날 일은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 아직 오지 않은 날을 붙잡고 불안해하며 오늘을 망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때가 되면 나름의 방법으로 풀어가게 될 테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나를 잘 다독이는 일이다. 손에 쥔 이 하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남들과 비교하는 것도 내려놓고 싶다. 그들이 가진 빛나는 순간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세상 사람들의 조건이 다 같은 게 아닌데, 어떻게 똑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넓은 들판을 걷고, 누군가는 좁은 골목을 지나야 한다. 그게 불공평하다고 투덜대기보다, 내 골목에서 피어난 작은 꽃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질척거리고, 막연한 기대에 의지하느니, 지금 내게 주어진 긍정적인 것들을 하나씩 꺼내보는 게 더 현명하다. 따뜻한 차 한 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나를 웃게 하는 작은 습관들. 이런 것들이 사실은 내가 가진 큰 선물이다. 남들이 보기에 대단하지 않을지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것들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생각을 되뇌어본다. 지금의 내가 괜찮다고, 미래는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된다고, 남들과 다를 필요 없다고. 반복해서 속삭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잠시 멈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보길. 지금, 여기의 당신으로 충분하다고.

비밀스러운 성공의 열쇠

이미지
  세상에는 참 묘한 사람들이 있다. 20대, 30대에 이미 인생의 큰 그림을 그려놓고, 40대가 되기 전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들. 그들은 대체 무슨 비밀을 가진 걸까? 나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궁금해하며 관찰했고, 결국 몇 가지 조용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건 내가 아는 한, 그들의 공통된 비밀이자, 입 밖으로 잘 내지 않는 삶의 기술이다. ​ 첫 번째 비밀은 그들이 시간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은 “나중에 하지 뭐”라며 미루기 일쑤인데, 이들은 다르다. 하루를 쪼개고 또 쪼개서, 마치 시간이 금처럼 소중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거나, 남들이 SNS로 한가로이 스크롤을 내릴 때 목표를 하나씩 점검한다. 그들은 시간을 낭비라는 이름의 도둑에게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 두 번째는 그들이 실패를 친구처럼 대한다는 점이다. 실패하면 좌절하거나 남 탓을 하기 마련인데, 이들은 오히려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한 번 넘어졌을 때 “이걸로 뭘 알게 됐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답을 다음 발걸음에 새겨 넣는다. 실패가 그들에겐 두려움이 아니라, 더 단단해지는 계단인 셈이다. ​ 마지막으로, 그들은 조용히 자신만의 길을 간다. SNS에 자랑하거나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에 그들은 그저 평범해 보일지 몰라도, 물밑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박수를 받기보다,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걸 선택한다. ​ 이 비밀들이 대단한 재능이나 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놀랍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인데,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쩌면 그게 진짜 비밀일지도 모른다. 40대 전에 더 잘되는 사람들은 결국 평범한 선택을 꾸준히, 그리고 다르게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비밀을 알게 됐으니, 이제 어떻게 할 건지는 당신 손에 달렸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치유와 성장하기

이미지
 우리의 뇌는 효율성을 추구한다. 익숙한 환경에서는 에너지를 절약하려 하고, 반복적인 행동을 자동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업무를 하고, 같은 습관을 반복하면서도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는 즐겁던 경험도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다. 뇌가 같은 자극에 둔감해지면서 새로운 동기부여를 찾지 못하면, 삶은 점점 무기력해지고 지루함에 빠진다. 권태로움이 지속되면 뇌의 도파민 분비가 줄어든다. 도파민은 동기와 즐거움을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로, 새로운 경험을 할 때 가장 활발하게 분비된다. 하지만 반복되는 환경에서는 이 과정이 점점 둔화되고, 그 결과 우리는 무기력함을 느끼거나 감정적으로 소진된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뇌를 다시 활성화하고 감정을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뇌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단순한 일상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자극을 주면, 도파민 분비가 촉진되고 다시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출근길을 바꾸거나 새로운 장소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사소한 변화도 뇌에는 신선한 경험이 된다. 새로운 환경은 신경망을 자극하고, 뇌의 가소성을 증가시켜 사고의 유연성을 높여준다. 반복적인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몰입(flow)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몰입 상태는 뇌가 가장 활발하게 작동하는 순간으로, 우리가 완전히 빠져들 수 있는 활동을 할 때 경험할 수 있다. 운동,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 글쓰기 같은 활동이 좋은 예다. 새로운 취미를 찾거나, 기존 업무에서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하면 뇌는 다시 도파민을 분비하며 활력을 되찾는다. 감각을 자극하는 활동도 뇌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자연 속을 걷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명상하면 뇌파가 안정되고 스트레스 반응이 줄어든다. 연구에 따르면, 숲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감소하고, 뇌의 전두엽이 활성화된다. 일상의 틀...

삶의 주인이 되는 길: 고대 철학자와 치유의 지혜

이미지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때로는 상처와 고민이 겹겹이 쌓여 방향을 잃고 흔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도 우리는 다시 길을 찾고, 스스로를 치유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고대 철학자들의 지혜는 마치 시간 너머에서 전해지는 메시지처럼 깊은 울림을 준다. 그들의 명언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주인으로 서기 위한 단단한 기반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남겼다. 이 짧지만 강력한 문장은 치유의 첫걸음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종종 외부의 소음—타인의 판단이나 세상의 기준—에 휩쓸려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즉 자신을 잊는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를 진정으로 아프게 하는가?”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곧 치유다.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려면 먼저 자신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정말 네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느냐?”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며, 비로소 자신을 이해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의 부재가 곧 쾌락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물질적 욕망이나 과도한 야망이 아니라, 단순하고 평온한 순간에서 삶의 본질을 찾으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 속에서 지친다. 더 많은 성취, 더 좋은 평가, 더 나은 결과만을 좇다 보면 정작 행복의 본질은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따뜻한 햇볕 아래 걷는 순간, 친구와 나누는 웃음, 조용한 새벽에 홀로 마시는 차 한 잔.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의 대표자로, “너에게 일어나는 일은 네가 바꿀 수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바꿀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삶은 때때로 고통스럽다. 예상치 못한 시련과 상처가 우리를 덮칠 때,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직장에서의 갈등, 인간관계에...

나이 들수록 후회하는 것들

 시간은 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가르친다. 젊었을 때는 앞만 보고 달렸던 순간들이, 나이가 들수록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지나온 날들을 되짚다 보면, 하지 않은 일들, 놓쳐버린 기회들, 그리고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누른다. 그러나 가장 깊은 후회는 거창한 실패가 아니라, 작고 사소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비롯된다.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사람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미뤘던 친구, 더 자주 안부를 물었어야 했던 가족, 그리고 소중한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이들. 젊을 때는 시간이 무한할 것처럼 착각한다. “나중에 만나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미루고 또 미룬다. 하지만 어느새 그 “나중”은 오지 않고, 그 빈자리는 후회로 채워진다. 한 번 더 따뜻한 말을 건넸다면, 손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 나이 들며 깨닫는 건, 관계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다. 또 하나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다. 하고 싶었던 일을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포기하거나, 남들의 기대에 맞춰 걸었던 길. 그때는 안정과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선택이 정당화된 것 같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내가 진짜 원했던 건 뭐였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꿈을 좇는 게 두려웠던 순간, 용기를 내지 못했던 날들. 나이 들수록 후회는 실패한 결과가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은 망설임에서 온다. 시간을 허비한 것도 아쉽다. 의미 없는 걱정에 잠 못 이루던 밤, 쓸데없는 비교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날들. 그 시간에 책을 한 권 더 읽거나,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당시에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한낮 바람처럼 덧없음을 깨닫는다. 후회는 어쩌면, 소중한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흘려보낸 무심함에 대한 대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열어준다. 나이 들며 생긴 주름만큼, 우리는 무엇이 진짜 소중한지 알게 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지금이 있다. 연락 끊겼던 친구에...

강인함 속에서 찾는 인생의 방향

 삶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시련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직장에서의 괴롭힘, 관계에서의 상처, 내면의 혼란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고통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은 특별한 강인함을 지닌다. 강인함이란 단순히 고난을 견뎌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를 직면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인생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강인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직장은 단순한 생계의 공간을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형성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괴롭힘을 마주할 때, 인간관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특히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공감 없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냉혹한 말과 행동으로 동료들을 짓누른다. 그들이 조직 내에 조성하는 긴장감은 개인의 심리뿐만 아니라 업무 환경 전체를 갉아먹는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강인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그들은 외부의 공격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며, 필요할 때는 침묵으로, 때로는 단호한 경계 설정으로 자신을 지킨다. 그들에게 강인함이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힘이다. 상처를 마주하는 용기 괴롭힘은 단순한 순간의 고통이 아니다. 반복될수록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치유는 그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 힐링이란 아픔을 억지로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풀어내는 과정이다. 누군가는 글을 쓰며 자신을 치유하고, 또 누군가는 자연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가까운 친구와의 대화나 따뜻한 차 한 잔도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고, 그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시련 속에서 찾는 인생의 방향 인생의 방향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시련을 겪을수록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된다. 직장에서의 괴롭힘을 이겨낸...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이미지
  우리는 누구나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고통은 예상치 못한 사고에서부터 시작하여, 실패, 관계의 단절, 경제적인 어려움, 건강 문제, 심지어는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는 순간들까지 우리를 찾아온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고통이 일시적이든, 오랜 시간이 걸리든, 그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고통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어쩌면 고통은 우리가 삶을 살아간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존재하는지, 얼마나 생동감 있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고통, 그것은 우리가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며,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는 징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을 피해가고 싶어 한다.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 고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부정하고 애써 외면하려 한다. “이건 내가 겪어야 할 일이 아니야, 아니면 그냥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고통을 숨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무기력하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를 낙담시킨다. 또 어떤 사람은 고통을 기회로 삼아, 그것을 통해 성장하고자 한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마주하고, 이해하고, 변화시키려 한다.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대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이다. ​ 하지만 현대 사회는 우리가 고통을 경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행복해야 한다’는 압박이 우리를 옭아맨다. 매일처럼 SNS에는 행복한 순간들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모두가 멋진 모습을 보이고, 자신을 더욱 빛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자꾸 비교하며,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사실, 그 행복의 이면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많은 고통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도 모...